집착과 욕망 훌훌 털어내는 수행도량
어느 날 불현듯 그곳에 가고 싶었다. 우리는 무엇을 그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한 채 자신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주하면 국립공원 치악산(雉岳山)이요. 치악산하면 구룡사((龜龍寺)를 생각한다. 그래서 원주시내에서 길을 물으면 누구나 잘 가르쳐 준다. 영동고속도로 횡성 새말IC에서 빠져나와 42번 국도를 이용하는 길을 아는 다른 지역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치악산 구룡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구룡사는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있다. 구룡사 입구 버스종점에서 걸어서 구룡사로 오르는 길. 왼쪽으로 언뜻 표지석이 눈에 띈다. 황장금표(黃腸禁標)다.
강원도기념물 제30호인 황장금표는 황장목(黃腸木) 봉산의 경계표시로서 옛날 궁중에서 필요한 황장목 금양(禁養)을 위하여 일반인의 도벌을 금지한 표석이란다. 오늘날 보호림 표식의 일종이다. 그만큼 예전에는 치악산의 소나무가 울창하고 질이 좋았다는 증거일 게다.
왼쪽으로 치악산자연학습원을 바라보며 오른쪽 비룡교를 건너면 얼마 안가서 원통문(圓通門, 일주문)이 나온다. 원통문은 다른 사찰에서 보는 일주문에 해당하는데,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어 유래한 말로 세속에서 쌓였던 때를 훌훌 털어버리고 일심(一心)으로 진리를 추구하라는 가르침이 담겨있다. 그런데 왜 구룡사는 원통문일까?
둥근 원처럼 중생의 고뇌를 두루 씻어 내겠다는 의지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왼쪽으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며 하늘로 치솟은 수십 길의 나무 숲길을 걸으면 그대로 깊은 산골짜기의 신비한 경지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계곡의 맑은 물을 따라 올라가니 맑은 공기가 도심에 찌든 가슴을 활짝 열어준다.
이어진 길 산사 입구, 전각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사천왕상의 부릅뜬 눈에 화들짝 놀라
뛰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어허, 이런! 이런!
절 입구 원통문에서 “부처님 저 들어갑니다” 하고 고(告) 했어야 하는 것을 잊었네….
이렇게 생각하며 합장하고 다시 한 번 쳐다보니 온화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속세의 때를 벗지 못하는 중생의 마음이리라. 하물며 속세의 중생이 죄짓지 않고 사는 이가 몇이나 될까,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 진다.
사천왕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나오는 수미산의 사방에 있어 불법을 지키는 네 신장으로 동쪽의 지국(持國)천황, 남쪽의 증장(增長)천왕, 서쪽의 광목(廣目)천왕, 북쪽의 다문(多聞)천왕이다.
다시 말해 동방을 수호하는 천신이 동방지국천왕이다. 이 천신은 국토를 지키고 중생을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맞은편에 남방을 지키는 천신이 있는데 중생의 이익을 더욱 길고 넓게 증장시켜 준다고 하여 존명이 남방증장천왕이다. 남방증장천왕 옆으로 서방광목천왕이 위치한다. 이 천왕은 수미산 서쪽의 수호신이며 세 개의 눈을 가지고 널리 보고 모든 것을 아는 전능한 신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서방천왕의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상이 북방의 수호천신이자 많이 듣고, 널리 듣고, 두루 듣는 천왕인 북방다문천왕이다.
그런데 각 존위는 동서남북이 아닌 동→남→서→북의 방위개념으로 위치하고 있다. 동서남북이 방위를 서로 반대개념, 즉 대칭으로 짚은 것이라면 동남서북은 원으로 짚은 것이다. 해 뜨는 동쪽에서 출발하여 해가 점점 길어지고 밝아지는 남쪽으로, 다음은 해가지는 서쪽으로 캄캄한 어둠의 북방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동남서북의 방위개념에는 우주의 자연이 주는 생체방위의 평화와 순리가 깃들여 있다.
사천왕문을 지나 돌층계를 오르니 바로 보광루다. 보광루 마루 밑을 지나 계단에 올라서니 대웅전이 마주한다. 자연석을 이용한 축대위에 전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세웠다. 대웅전은 2003년 화재로 전소된 것을 1년만인 2004년 11월에 준공한 것이다. 불단부터 삼세불, 신중탱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전과 똑같이 복원해 놓았다. 특히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물인 대웅전 내부의 닫집은 조선후기 조각술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구룡사에 최근에는 불자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지금이야 템플스테이를 진행하는 사찰이 많지만 아직 생소하던 2002년 전국에서 최초로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다.
천년사찰의 향기 ‘물씬’…찾는 발길 줄이어
전설에 의하면 원래 대웅전 자리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곳에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은 그 연못자리가 좋아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고 용들과 도술시합을 했다. 용들이 먼저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뇌성벽력이치고 산들이 모두 물에 잠겨버렸다. 용들이 흐뭇해 하며 주변을 살피니 의상은 비로봉과 천지봉에 줄을 걸어 배를 매놓고 그 안에서 자고 있었다. 다음은 의상이 움직였다. 부적을 한 장 그려 연못에 넣었다. 그러자 연못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용들이 뜨거워 날뛰었다. 그때 놀란 용 여덟 마리가 절 앞산을 여덟 조각내면서 동해로 도망치고, 한 마리는 눈이 멀어 계곡의 못에 머물렀다. 그래서 절 이름도 구룡사(九龍寺)라 했다. 세월이 흘러 절이 퇴락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나타나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 했다. 그대로 했더니 절이 더 힘들어 졌고 폐사가 되려 했다. 이번에는 한 도승이 나타나 훈수를 했다. 거북의 혈맥을 끊어서 절이 쇠락해 졌으니 다시 그 혈맥을 이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구룡사 계곡 안쪽으로 구룡폭포를 비롯 귀암, 호암, 용연 등의 경치 좋은 곳이 많다.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6년(666)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니 1350년이나 되었다. 구룡사 사적기에는 신라 말의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했는데 그래도 1천년이 넘었다. 지금의 오래된 건물들은 ‘강희(康熙) 45년’ 명(銘)의 와당이 출토되어 숙종 32년(1705)에 증건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도시 가까이에 깊은 계곡과 천년고찰이 있다는 것이 현시대에서 느끼는 감정이 새롭다.
돌아오는 길.
어허, 이런! 또 잊었네. 스님께 법어 한 말씀이라도 듣고 와야 하는 것을….
그러나 산사를 벗어나는 길목에서 계곡 물소리는 이렇게 자꾸만 속삭이고 있었다.
譬如厚石 風不能移 /智者意重 毁轝不傾 (비여후석 풍불능이 지자의중 훼여불경)
단한한 돌을 바람이 옮기지 못하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뜻이 무거워 비방과 칭찬에도 기울지 않는다….
<최호철 본지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