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종
엊그제 삼척장날 아내가 꽃망울 맺힌 동백나무 한그루와 채송화, 해바라기 씨앗을 사다 주었다. 다행히 집에 큰 화분이 있어서 동백(冬柏)은 옮겨 심고 씨앗은 적당한 화분에 얕게 뿌렸다. 이제부터는 낯과 밤 볕과 별 그리고 바람이 이 생명들을 키워낼 것이다.
여명이 밝기 전 가장 어두운 것처럼 씨앗도 뿌리도 바닥 표면을 채우고 싹은 어둠을 뚫고 꽃망울 터트려 만개할 그날의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오직 꽃을 피우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일념의 고통을 겪을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의 전진을 본다. 그리고 환한 꽃송이를 피워 맑은 향기를 전해 줄 것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가 되어 인간의 의지가 아닌 자연이 선택한 씨줄에 의해 날줄로 이어 갈 것이다.
고난 없이 향기롭게 피는 꽃은 없다. 힘들어도 좋은 날이 오리라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기다림은 그리 더디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가 심고 뿌려 놓은 나무와 씨앗은 조금만 관심을 더해 보살펴준다면 반드시 개화하는 날이 올 것이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척박한 이국땅에서 기구한 삶을 살다간 왕소군을 애닳아 하며 읊은 시로 우리는 이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한다.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아픈 시절이 있었다. 김종필 전 총리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는 정국의 불안정함을 봄이 와도 온 게 아니라는 ‘춘래불사춘’으로 표현이 했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2월에는 ‘춘래불사춘’을 언급하면서 “마스크를 벗고, 꽃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는 봄다운 봄은 잠시 마음속에 담아두실 것을 요청한다”고 당부했다. 왕소군이 고국의 봄을 그리워한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가 함께 누릴 희망의 봄을 손꼽아 기다려 보지만 “아니올시다”가 될 공산이 크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엿새째 400명대를 이어가고 있다.
코로나와 함께 두 번째 맞이하는 완연한 봄, 노랗게 핀 산수유 꽃, 활짝 핀 진달래꽃, 벚꽃나무 아래 유채꽃이 피어도 가까이 다가가 향유할 수 없다. 방역조건을 준수하는 차원에서 전면 통제 또는 소수 인원만 출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짜증이 나고 답답한 판에 LH공사 수도권 부동산 투기 의혹과 더불어 촉발된 공직자들의 부동산투기 의혹에 너나 할 것 없이 분통이 터진다. 이 뿐인가. 정치 경제 사회 등 총체적으로 우공지곡(愚公之谷)에 들어와 있다.
제나라 환공이 사냥을 나가 사슴 한 마리를 쫓다가 자기도 모르게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한 노인을 만난 환공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노인이 “우공지곡(愚公之谷)이라는 골짜기 입니다” 라고 말하자 환공은 “우공지곡이라?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 왜 어리석은 우(愚)자를 써서 우공이라고 하는가?” 라고 묻자 “제가 예전에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새끼 한 마리를 낳았습니다. 그 송아지가 자란 다음에는 팔아서 망아지를 샀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오더니 ‘소는 망아지를 낳을 수 없으니 당신 것이 아니오’하고는 다짜고짜 망아지를 끌고 가버렸습니다. 이웃들이 그 일을 알고 어리석다고 비웃으며 이 골짜기를 우공지곡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노인의 말을 들은 환공은 “내가 듣기에도 그대는 어리석은 일을 했군. 왜 그 망아지를 남에게 내준단 말인가?”라며 비웃음을 던지고 돌아갔다.
궁으로 돌아온 환공은 이튿날 조회 때 그 일을 우스갯소리로 관중에게 말했다. 재상 관중(管仲)이 무릎을 꿇고 통렬히 사죄했다. “나라에 법률과 제도가 엄격히 살아 있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국정 책임자인 자신의 과오라고 사죄한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윗물이 맑음과 상관없이 스스로 정화하는 아랫물에서 꽃을 피우며 서로를 향유하며 산다. 아랫물을 탓하는 위에 사는 분들의 안하무인(眼下無人)은 이젠 도를 넘어 국민을 동물농장으로 보는 것은 아닌지 두렵기까지 하다. 이 시대의 관중(管仲)은 없고 진나라 환관 조고만 있는 것 같아 나라 장래가 심히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라도 되는 것인가.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은 경원총집서문(序文)에서 “구더기는 똥을, 말똥구리는 말똥”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람은 사람을 좋아해야 하고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산다. 정치란 이견(二見) 사이를 좁히는 것이다. 정치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열(分列)로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이것은 일시적인 시중잡배들의 구역 경쟁일 뿐 던져진 뼈다귀를 차지하려는 개 무리들이나 하는 짓이 아닐까?
코로나 팬데믹(pandemic)시대 고통으로 시름하는 우리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본지 공동대표>